
동남아나 아프리카로 여행을 앞두고, 병원에서 말라리아 예방약을 미리 챙겨 본 적이 있을 것이다. 그런 경험이 없더라도, 한여름 밤 팔뚝에 앉은 모기를 찰싹 때려잡아 본 기억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.
말라리아는 교과서 속 옛날 병이 아니라, 지금도 우리 삶의 언저리를 맴돈다. 그런데 이 익숙한 병의 이름을 그대로 풀어 보면 좀 이상하다. Malaria 말라리아. 그 뜻은 뜻밖에도 ‘나쁜 공기’다.
병의 이름에 정작 진짜 원인은 없고, 완전히 틀린 옛 오해가 그대로 박제되어 있는 셈이다. 어쩌다 모기가 옮기는 병에 ‘공기’라는 이름이 붙었을까.
Malaria 말라리아는 ‘나쁜 공기’라는 뜻이다
말라리아는 이탈리아어 mal’aria에서 왔다. ‘나쁜’을 뜻하는 mala와 ‘공기’를 뜻하는 aria가 합쳐진 말이다.
즉 글자 그대로 옮기면 ‘나쁜 공기(bad air)’다.
이 이름에는 이유가 있었다. 말라리아는 유독 습지대 근처에서 많이 번졌다. 그래서 사람들은 늪과 웅덩이에서 피어오르는 탁하고 축축한 공기, 이른바 ‘장기(瘴氣)’가 병을 일으킨다고 믿었다.
사전은 이 오해를 이렇게 기록한다.
말라리아는 이탈리아어 mal’aria, 곧 ‘나쁜 공기’에서 왔다. 이 병은 이제 모기가 옮긴다고 알려졌지만, 한때는 습지대의 더러운 공기가 원인이라고 여겨졌다.
“…from Italian mal’aria… The disease, now known to be mosquito-borne, once was thought to be caused by foul air in marshy districts.”
Online Etymology Dictionary, ‘malaria’

이 단어가 영어에 들어온 것은 1740년 무렵이다. 그전까지 영어권에서 이 열병을 부르던 말은 Ague 학질열이었는데,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‘말라리아’가 그 자리를 밀어내고 오늘날의 이름으로 굳어졌다.
진짜 범인은 공기가 아니라 모기였다
공기가 범인이라는 믿음은 백 년 넘게 이어졌다. 그 오해를 깬 것은 19세기 말의 두 사람이다.

1880년, 알제리에 주둔하던 프랑스 군의관 샤를 라베랑은 말라리아 환자의 피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. 적혈구 안에서 꿈틀거리는 미생물이었다.
공기가 아니라 피 속의 작은 기생충이 병의 원인이었던 것이다. 이 기생충은 훗날 Plasmodium 말라리아 원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.

그렇다면 이 기생충은 어떻게 사람 몸에 들어올까. 그 답은 1897년, 인도에서 일하던 영국 군의관 로널드 로스가 찾아냈다.
로스는 환자의 피를 빤 모기의 몸속에서 바로 그 원충을 찾아냈다. 이듬해 이탈리아의 그라시는 그중에서도 Anopheles 학질모기만이 사람 말라리아를 옮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.
나쁜 공기가 아니라 모기 한 마리. 늪지에서 병이 많았던 건 공기가 나빠서가 아니라, 그저 늪이 모기가 알을 낳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. 이름은 엉뚱한 범인을 가리키고 있었다.
나무껍질이 특효약이 된 사연
원인을 몰랐던 시절에도,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약은 알고 있었다.
남아메리카 안데스의 원주민들은 예부터 Cinchona 키나나무 껍질을 열병에 썼다. 17세기, 이 껍질을 맛본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 효과에 놀라 유럽으로 가져왔다. 그래서 한동안 이 약은 ‘예수회의 껍질(Jesuit’s bark)’이라 불렸다.

1820년, 프랑스의 두 약사 펠르티에와 카방투가 이 껍질에서 유효 성분을 뽑아내는 데 성공한다. 바로 Quinine 퀴닌이다.
퀴닌은 20세기에 합성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, 말라리아에 맞설 인류의 거의 유일한 무기였다. 열대 식민지의 영국인들이 쓴맛 나는 퀴닌 물에 진을 타 마신 것이 오늘날 칵테일 ‘진토닉’의 뿌리가 됐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.
동양은 이 병을 ‘학질’이라 불렀다
그렇다면 우리는 이 병을 뭐라고 불렀을까. 바로 瘧疾 학질이다.
학질의 ‘학(瘧)’은 병을 뜻하는 부수(疒) 안에 ‘사나울 학(虐)’이 들어앉은 글자다. 곧 ‘사납게 앓는 병’이라는 뜻이다. 서양이 애먼 공기를 탓하는 사이, 동양은 이 병의 지독한 고통 자체를 이름에 담은 셈이다.
학질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우리말 관용구에도 남아 있다. 몹시 괴로운 일에서 겨우 벗어났을 때 우리는 “학을 뗐다”고 말한다. 여기서 ‘학’이 바로 이 학질을 가리킨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설이다. 그만큼 한 번 걸리면 진저리가 나도록 앓았다는 뜻이다.
이름은 틀렸다. 말라리아는 나쁜 공기가 아니었다. 그래도 그 틀린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, 한때 인류가 무엇을 몰랐는지를 알려 주는 화석으로 오늘까지 남았다.
참고 자료
- Online Etymology Dictionary, ‘malaria’, etymonline.com/word/malaria (mala aria ‘나쁜 공기’, 1740년 영어 유입, 늪지 나쁜 공기설).
- ‘History of malaria’, 위키백과(공개 자료) 및 각 인용 출처: 라베랑의 원충 발견(1880), 로스의 모기 매개 증명(1897), 그라시의 학질모기(Anopheles) 확인(1898), Marchiafava·Celli의 Plasmodium 명명(c.1890).
- 키나나무 껍질(cinchona)과 퀴닌: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럽에 전파, 1820년 펠르티에·카방투가 퀴닌 분리.
- 한자 瘧疾(학질) = 병(疒) + 사나울 학(虐). 관용구 ‘학을 떼다’의 학이 이 학질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설(통설).
- 이미지: Wikimedia Commons (Public Domain·CC BY 4.0). 각 사진 설명에 작가·라이선스 표기.